세계 희망의 날, 흙이 우리에게 건네는 희망

협동조합 이장 임경수
12월 5일은 ‘세계 토양의 날’이다. 토양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UN FAO가 2014년 공식 지정한 날로, 토양 보전에 헌신한 태국 푸미폰 국왕의 생일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에는 3월 11일 ‘흙의 날’이 따로 있지만, 세계 토양의 날은 기후와 생태 위기 속에서 토양의 중요성을 세계적으로 환기하는 의미가 크다. 기후, 식량, 생태계, 지역사회까지 연결된 복합위기의 시대에 토양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토양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토양을 물리적 입자의 집합, 땅바닥의 물질로만 취급하며, 생명과 생태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네트워크로 보지 않는다. 예컨대 “고령의 나무는 탄소를 흡수하지 않으니 베고 어린나무로 대체해야 한다”라는 주장은 토양에 대한 무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눈에 보이는 성장의 잣대로는 나무만 보이지만, 오래된 숲일수록 토양은 더 성숙해지고 유기물 함량이 높아져 탄소를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저장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토양은 언제 어디서나 식물을 키워내 토양을 건강하게 만들며 탄소를 흡수, 격리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나무만 보고 토양을 배제하는 순간 우리는 큰 오류에 빠진다.
이런 오류는 결국 생태문해력(ecological literacy) 부족에서 비롯된다. 생태문해력은 단순한 생태적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 있는 연결망’으로 읽어내는 능력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토양이다. 토양은 미생물, 균근균, 박테리아, 선충, 미세 절지동물 등 셀 수 없는 생명이 만드는 공동체이며, 이들의 활동이 영양분을 순환시키고 물과 탄소를 저장하며 생태계를 안정시킨다. 식물이 흡수하는 영양분의 절반 이상이 뿌리 자체가 아니라 토양 생명 네트워크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흙을 콘크리트로 덮고, 파내고 옮기며, 농업에서는 과도한 경운과 비료, 농약으로 폭력을 자행하고 스마트팜은 아예 토양의 역할을 지우고 있다. 토양을 거대한 생명의 기반으로 보는가, 단순한 물질로 보는가는 농업·산림·지역·기후정책의 방향을 완전히 갈라놓는 문제다.
석유문명은 토양을 대체가 가능한 물질로 보았고, 그 역할을 화학비료·농약·농기계로 대신하면 식량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완전한 해답에는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면서 온실가스를 배출했고 상승한 기온은 다시 식량 생산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반대로 토양을 회복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토양은 여전히 지구에서 가장 크고 안정적인 탄소 저장고이며, 산업화 이후 인류가 대기 중에 배출한 탄소의 상당 부분을 다시 흡수하고 저장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가 추진한 ‘4퍼밀(4‰) 이니셔티브’는 토양 유기물 함량을 매년 0.4%만 높여도 기후위기 완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에서 출발했다. 기후를 안정시키는 힘이 땅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의 문명은 흙 위에 세워져야 한다. 생태문명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토양 생명 위에 농사를 회복하고, 마을을 재생하고, 도시의 물순환과 생태망을 복원하는 구체적 실천에서 시작된다. 건강한 토양이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데는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토양을 보전한다는 것은 이미 다음 세대를 향한 책임을 다하는 일이다. 세계 토양의 날이 돌아온다. 토양을 물질에서 생명으로, 대체 가능한 대상에서 문명의 기반으로 바라보는 생태문해력을 회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중위기를 넘어 다음 세대에게 당당히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